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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트레킹 여행, 실스마리아여행지 이야기 2021. 10. 22. 23:13
2014년 개봉한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를 보신 적 있으신가요? 한물간 여배우를 통해 ‘인간의 늙어감’과 ‘멈추지 않는 인간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감동적인 작품인데요. 무엇보다 배경이 된 스위스 실스 마리아 풍광에 홀딱 반해버렸습니다. 이곳은 트레킹 코스로도 유명한데요. 여길 가려면 먼저 제2회, 5회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유럽의 고급 휴양마을인 생 모리츠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쯤 가면 약 1,840m 높이의 ‘엔가딘 고원’ 위에 자리한 실스 마리아에 도착하게 됩니다. 철학자 니체가 요양 중에 여러 작품을 남긴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이기도 한데요. 이곳에 영화 주인공이 산책하던 멋진 트레킹 코스가 있습니다. 바로, 마을 뒷산인 무르 텔의 산허리를 산책하는 ‘센다 수를 레이’입니다. 본래 코스는 실스 마리아까지 이어지지만, 그보다는 고원의 6개 호수를 따르는 길을 추천합니다.
트레킹 기점은 케이블카가 다니는 수를 레이 승강장입니다. 여기서 대형 케이블카를 타고 15분쯤 오르면 무르 텔 중간 승강장이 나오는데요. 여기가 트레킹 코스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그전에 무르 텔 정류장에서 코르바취 전망대까지 케이블카로 올라 장대한 조망을 즐기는 것이 순서입니다. 3,303m 높이의 코르바취 전망대는 스위스에서 3번째로 높은 전망대인데요. 앞쪽으로 험상궂게 생긴 무르 텔 봉우리가 떡 버티고 있습니다. 그곳 설사면으로 두 명의 산악인들이 한 발짝, 한 발짝 정상으로 향하는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반대쪽을 바라보면 실스호수와 실버 프라나 호수 가운데 자리한 실스 마리아, 그리고 베르니나 알프스의 고봉들이 어울린 모습이 장관이었습니다. 전망대를 나오면 설산을 걸어볼 수도 있는데요. 눈밭에 누워 바라보는 하늘은 놀랄 만큼 시퍼렇습니다. 조망과 설산을 마음껏 즐겼으면, 이제 본격적으로 트레킹에 나설 차례입니다.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무르 텔 정류장에서 내려 걷기를 시작하는데요. 넓은 임도길이 한동안 이어지다가 꽃동산이 나타납니다. 언덕 전체가 꽃으로 가득한 그야말로 꽃대궐인데요. 미나리아재비와 동의나물 같은 노란 꽃들이 지천이었습니다. 꽃과 어우러진 실스호수와 실버 프라나 호수 풍경은 그야말로 천국처럼 보였죠. 꽃동산을 지나면임 도길과 오솔길이 갈리는데요. 임도길로 갔다가 오솔길로 돌아오는 것이 좋습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언덕을 오르면 겨울철에 운행하는 리프트 정류장과 서너 개의 작은 호수가 보입니다. 그곳으로 트레킹 루트가 이어집니다. 임도의 끝자락에는 이곳 고원에서 가장 큰 호수가 나오는데, 생김새가 마치 하트 모양과도 같았습니다.
하트 호수를 지나면 푸르 쉘라 스 케이블카 정류장이 보이는데요. 그곳으로 내려가면 실스 마리아 마을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 길은 경사가 가파르고, 아직 고원에서 볼 것이 많기에 반대편 오솔길로 걸어보세요. 그러면 다시 꽃길이 이어지고, 서네 개의 작은 호수를 연달아 만납니다. 이 호수들이 ‘센다 수를 레이’ 트레킹의 숨은 보물인데요. 마치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한 초지에는 야생화가 가득합니다. 꽃밭에 앉아 준비해 간 샌드위치 먹는 맛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다시 길을 나서면 언덕 위 벤치가 나오는데요. 에메랄드빛 가득한 실스호수와 실버 프라나 호수가 잘 보입니다. 여기서 잠시 쉬는데, 영화 속 한 장면인 ‘말로야 스네이크’가 떠올랐습니다. ‘말로야 스네이크’는 이탈리아 코모 호수에서 피어오른 안개가 실스 마리아 서쪽의 말로야 패스의 나직한 골짜기로 굽이쳐 올려오는 모양이 마치 뱀 같아서 붙인 이름인데요. 실제로 영화 마지막 부분에 스멀스멀 뱀처럼 몰려와 계곡과 마을을 가득 메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모습을 상상히니 저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슬슬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니 휘파람이 절로 나는 평탄한 오솔길이 펼쳐집니다. 처음에 만났던 갈림길을 지나 구불구불 이어진 내리막을 내려오면 울창한 전나무 숲을 만나고, 트레킹 기점인 수를 레이 정류장에 도착합니다.
실스 마리아는 호수와 알프스가 기막히게 어우러집니다. 이곳이 영화 배경지가 된 건 우연이 아니겠죠. 트레킹을 마치면 실스 마리아를 방문해 니체 하우스와 마을을 구경하는 걸 추천드립니다. 1879년 바젤 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병든 몸으로 이곳에 들어온 니체는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지금 마치 약속의 땅에 와 있는 것 같다. 처음으로 구원을 느낀다.”라고 썼다고 합니다. 이곳 마을 골목과 실스호수를 걸으면서, 요양하면서 ‘초인’을 떠올린 니체의 심정을 떠올려보시면 어떨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