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기업의 비전과 슬로건
    경제 이야기 2021. 10. 21. 22:27

    여러분은 기업의 비전이나 슬로건 혹은 캐치프레이즈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일반적으로 기업 경영의 지향점을 나타내는 것 혹은 기업의 전략을 짧게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최고경영자가 자신의 경영철학을 나타내는 짧은 구절 혹은 구호라는 느낌도 줍니다. 기업에는 없어서는 안 될 것 같지만 그렇다고 이것 없다고 당장 사단이 날 것 같지는 않군요. 물론 이것이 없다면 뭔가 현대식 경영의 기초가 없는 기업 같아 보일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혁신의 도구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 혁신의 연장통에 넣어둘 만한 쓸모 있는 그런 도구 말이죠.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당시 자동차 회사 혼다는 혼다 시빅과 어코드가 잘 나가고 있었지만 여기에 매몰되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혼다는 새 콘셉트 카를 개발하기로 합니다. 탑 매니지먼트가 뽑은 프로젝트 슬로건은 “Let’s gamble”이었습니다. 곧 엔지니어 출신 히루 와타나베를 책임자로 앉힙니다. 최고경영진의 요구사항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기존 혼다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 새로운 콘셉트를 찾을 것. 둘째, 비싸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싸구려가 되면 안 될 것.

     

    하지만, 몇 달째 제자리 걸음입니다. 팀원 중에서는 혼다 시빅을 소형화하면 어떻겠냐는 제안도 합니다. 하지만 이게 답이 아니란 건 분명했습니다. 프로젝트 팀장인 와타나베는 이 과제를 표현하기 위해 ‘자동차 진화론’이란 다른 슬로건을 하나 만듭니다. 사실상, 이 문구는 "만약 자동차가 유기체라면, 어떻게 진화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팀원들은 이 슬로건을 놓고 고민했습니다. 그러면서 ‘디트로이트적 논리’가 “모양을 위해 편안함을 희생시킨 것, 이라고 결론 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또 다른 슬로건을 하나 도출하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그 유명한 ‘M-M철학’입니다. “탑승자를 위한 공간은 최대로, 기계를 위한 공간은 최소로” 혹은 “man-maximum, machine-minimum”이란 슬로건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나온 결과물이 바로 톨보이(Tall Boy)라는 콘셉트였습니다. 길이는 짧지만 높이는 높은 ‘네모난 상자’, 바로 박스카였습니다. 디트로이트처럼 사람을 구겨 넣는 대신 엔진과 기어박스를 남는 공간에 구겨 넣은 셈이었죠. 누구도 처음에 혼다 시티(Honda City)란 차를 그려내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상상을 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왜 가치 있는 것인지 설명하 수 없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Let’s gamble”이란 슬로건은 ‘자동차 진화론’이란 슬로건을 거쳐 다시 “man-maximum, machine-minimum”이란 방향으로 끌고 갔고, 결국 톨보이란 콘셉트로 진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혼다 시티뿐 아니라 모든 박스형 경차의 진화의 시발점이 될 수 있었습니다.

     

    더 기막힌 사례도 여럿 있습니다. 여러분이 샤프란 단어를 들으면 한편으로는 샤프펜슬이라고 부르는 것과 샤프란 기업이 떠오를 텐데요. 맞습니다. 샤프는 하야카와 토쿠지(Hayakawa Tokuji)가 창업한 하야카와 전기공업이 모태입니다. 실상 0.5 밀리(mm) 샤프를 처음 개발한 곳이 이곳입니다. 1964년엔 트랜지스터 계산기, 1966년엔 집적회로(IC) 계산기, 1969년엔 첫 포켓 계산기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이 포켓 계산기는 샤프를 혁신기업 반열에 들게 했습니다. 1970년엔 샤프로 사명을 바꿉니다. 그리고 1973년 샤프는 optoelectronics라는 슬로건을 내놓습니다. 광학을 뜻하는 opto와 전자공학을 뜻하는 electronics를 결합한 신조어였습니다. 이 ‘광전자공학’이란 단어는 샤프가 미래 자신이 어떤 기업이 되어야 하는지 나타내는 표제가 됩니다. 샤프는 액정 디스플레이(LCD) 기술과 반도체 기술이 결합된 광범위한 제품을 내놓습니다. 최초의 액정디스플레이(LCD) 계산기, 포터블 TV, 포켓 노트북, LCD 프로젝션, 그리고 액정 디스플레이를 단 미니디스크 플레이어까지. 훗날 이 optoelectronics이란 기묘한 단어는 샤프 성공의 ‘개념적 우산(conceptual umbrella)’이 됐다고 일컬어집니다. 겉보기에 의미 없고 추상적인 용어로 보이지만 수없이 이질적일 수밖에 없는 다양한 사업과 전략을 일관되게 연결하고 관통하는 무엇인가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슬로건이나 캐치프레이즈라고 하면 은근 코웃음이 나옵니다. 앞에서는 뭔가 중요한 것인 양 심각한 얼굴로 말하지만 돌아서면 “뭐, 그렇고 그런 구호 같은 거지”란 생각이 듭니다. 혁신이나 성장하고는 별반 상관이 없을 듯합니다. 적어도 당장은 말이죠. 하지만 누군가는 여기서 그전에 없던 혁신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종종 그것은 다른 혁신의 통로로는 찾아내지 못했을 그런 혁신을 창조해 냅니다. 만일 이것들을 가끔 모여서 한 손 들고 “으쌰 으쌰”할 때 외치는 구호로 여겼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분명 누군가는 ‘단어 하나’에 기업의 나아갈 방향을 담아냈고 혁신의 공간을 만들어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