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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목사고을 전남 나주여행지 이야기 2021. 10. 21. 00:24
고려 현종 9년인 1018년, 당시 전주를 중심으로 한 ‘강남도’와 나주와 제주를 중심으로 한 ‘해양도’를 하나로 합쳤는데요. 전주의 첫 글자와 나주의 첫 글자를 따서 ‘전라도’로 명명했습니다. 그로부터 벌써 천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오늘은 시간을 거슬러 천년의 역사를 품은 전라남도 나주로 떠나볼까 합니다.
나주야 말로 작은 한양이라 불릴 정도로 호남 행정의 중심지입니다. ‘천년 목사고을’이라는 별칭이 있는데요. 이는 천년 동안 목사를 배출한 고장을 의미합니다. 그 나주목사가 기거했던 건물이 금학헌(琴鶴軒)인데요.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학처럼 고고하게 살고자 하는 선비의 지조가 깃든 집’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1980년대 후반까지 나주 군수의 관사로 사용했을 정도로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주에는 천년 동안 390여 명의 목사가 거처 갔는데요. 그중 두 분의 목사가 가장 존경받고 있습니다. 나주 목민들이 상소를 올릴 정도로 선정을 베풀어 나주에 2번이나 부임한 유석증 목사와 관문인 정수루에 북을 놓아 목민들의 억울함을 풀어준 김성일 목사입니다. 그래서 금학헌에는 두 분의 이름을 딴 방이 마련되어 있는데요. 지금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고, 한옥민박체험도 할 수 있습니다. 마당으로 걸어 나가면 500년 수령의 팽나무가 눈길을 사로잡는데요. 벼락을 맞아 두 쪽으로 갈라졌지만 강한 생명력으로 기적처럼 살아나 금학헌의 대들보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벼락 맞은 나무는 큰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하니 소원을 한번 빌어 보시면 어떨까요?
금학헌 옆에 자리한 금성관은 우리나라 객사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합니다. 이곳은 나주목사가 업무를 보던 곳인데요. 나주로 출장 오게 된 관리들이나 외국 사신들이 머물다 가는 객사 역할도 했습니다. 건물 중앙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와 궐 패가 모셔져 있는데,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을 향한 망궐례를 올렸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 김천일의 출정식이 있었고, 구한말에는 시해된 명성황후의 관을 모셔 항일정신을 드높였던 역사적인 현장입니다.
금성관에서 돌담을 따라 5분쯤 걸으면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나주향교가 보입니다. 대다수의 향교가 전학 후 묘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나주향교는 한양의 성균관과 같이 제사공간인 대성전이 앞에 있고, 학문을 배우는 명륜당이 뒤에 있는 전묘 후학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임란 때 성균관이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 나주향교를 참고해 복원했다고 알려져 있지요.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의 흙벽은 공자의 고향인 산둥반도에서 그 흙을 가져와 벽에 발랐다고 하니 그 정성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마당에는 기하학적인 선이 그려져 있는데요. 이는 수업을 마친 유생들이 선을 밟으며 배운 것을 복습하기 위한 용도였습니다. 사서삼경을 읊조리며 그 깊은 뜻을 가슴에 새기던 유생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보세요. 600년 수령의 은행나무는 길게 가지를 내뻗고 있습니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해서 '행단(杏壇)이 유행했지요. 그래서 전국의 향교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많습니다. 은행 열매처럼 학문의 수확을 많이 거두라는 의미가 있고요. 벌레가 잘 안 생기지 않아 바른 사람으로 성장하라는 의미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나주시청 부근에는 사랑의 샘이라 불리는 완사천이 있는데요. 후삼국시절 나주호족의 딸 장화왕후와 왕건의 사랑이야기가 깃들어 있습니다. 어느 날 왕건이 말을 타고 샘 옆을 지나가다 물을 기르는 처녀에게 물 한 바가지를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옆에 있던 버드나무에서 잎을 하나 따서 물 위에 띄운 후 왕건에게 내밀었습니다.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할까 봐 한 행동이었는데요. 그 마음에 반한 왕건은 처녀를 부인으로 맞았고요. 둘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바로 고려의 2대 임금인 혜종입니다. 이렇게 나주는 애틋한 사랑이 묻어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천년고을 나주, 어떠셨나요? 선비들의 발자취를 걸어보면서 올곧은 마음을 가다듬는 여정이 되었으면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