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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인문학(humanities) 2021. 12. 15. 21:59
우리는 부모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받습니다. 대표적으로 유전적 특질을 물려받죠.
남자들은 나이 들면서 잊고 있었던 아버지의 모습과 매우 닮은 자신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물려받는 건 이뿐만이 아닙니다.
부모의 '계급적 처지'가 유산이라는 형태로 자식에게 그대로 이어지기도 하고, 과거 시대의 전통이 부모를 통해 자식에게 전달되기도 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독립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사춘기에 접어들면 부모와 자식의 갈등이 나타나게 되지요.
부모와 갈등을 겪는 이 시기에 남성은 아버지를 극복하는 문제에 직면합니다.
아버지의 개인적 성격이 자애로운지, 권위적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장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기성 권력'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기성의 권력을 상징하는 한, 아버지를 극복하는 문제,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자식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극복이라는 가장 비밀스러운 성년의식을 통과해야 성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가 카프카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고자 애쓰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절망하고 고민했던 그는 '항변'의 방법으로 아버지를 넘어서고자 했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느꼈던 압박을 부치지 못한 편지 형식을 통해 표현했지요.
그렇게 탄생한 책이 바로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는 비록 사회학자는 아니지만 아버지로부터 독립되어 가는 과정을 고찰하며 사회학자와 다름없는 해석을 내렸죠.
"아버지는 저한테 그토록 엄청난 권위로 여겨지던 분이셨어요. 그로 인해 세계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지요.
그 하나는 제가 살고 있는 노예의 세계로 나를 위해서만 제정된, 그러나 왠지 모르게 나로서는 결코 온전히 따를 수가 없는 법칙들이 지배하는 세계였고, 두 번째로는 내 세계와는 무한히 멀리 떨어진 세계로 아버지가 살고 계신 세계였는데 그곳에서 아버지는 통치하는 일에 열중하여 수시로 명령을 내리셨고 그 명령이 지켜지지 않을 때면 크게 역정을 내셨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세계는 나머지 사람들이 사는 세계였는데 그들은 명령과 복종의 일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저는 줄곧 치욕 속에서만 살았지요. 아버지의 명령에 따랐으나 그건 치욕이었습니다"
카프카는 독립적인 인간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아버지를 극복하는 문제는 불효가 아니라, 새로운 아버지 상에 대한 갈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카프카에게 아버지는 기성의 권력이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관습의 대변자이자, 가부장적 질서의 대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카프카에게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는 자식이 성장해 기성의 권위주의에 기대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 나오는 치유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가 완성되었을 때, 카프카는 사실 아버지에게 그 편지를 부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그는 아버지로부터 독립적 개체로 성숙했기 때문이죠.
사람은 모두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사회적 운명'을 바탕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부모의 시대와 대결하는 방법을 깨닫고 그렇게 성인이 되지요.
그렇게 성인이 된 사람들은 더 이상 누구의 자식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자신감이 내면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도 누구누구의 자식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아버지는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이름만 대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사람의 자식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커녕 아버지의 이름으로 가능한 모든 프리미엄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아버지의 지위를 활용하고 아버지의 재력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그러다 어떤 중소기업 사장 아들은 술에 취해 기내에서 승무원에게 침을 뱉고 난동을 부리기도 하고, 어떤 재벌 회장 아들은 술집 종업원을 폭행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오직 자신의 이름만으로 그 자리와 부를 이룩할 수 있었을까요?
성인이 되면 생물학적으로는 누구의 자식이라 하더라도 독립된 성인으로, 즉 자기만의 이름으로 살아가고자 애씁니다.
독립된 성인으로서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살아가고자 합니다. 카프카처럼 말이지요.
여전히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아가느냐, 아니면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느냐 어느 것이 성인됨에 가까울까요?
이미 여러분은 답을 알고 계실 겁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