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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요인인문학(humanities) 2021. 12. 16. 00:05
우리가 보통 '후진국 병'이라고 하면
위생상태가 좋은 선진국보다는
후진국에서 발병률이 높은 병을 말합니다.
콜레라나 말라리아 같은 전염병이 대표적이죠.
그런데 이런 질병만이 아니라
어처구니없는 대형 참사가 벌어졌을 때도
'후진국 병'이 도졌다며 비꼬기도 합니다.
제대로 관리를 했다면,
조금만 더 기술력이 좋았다면
막을 수 있었던 참사가 발생했을 때
주로 이런 표현을 쓰죠.
그런데 뉴스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사실 대형 참사는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나라에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비행기 사고나 기차 사고는
꼭 후진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죠.
여기서 더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기술이 더 발달했다면
정말 후진국 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혹시 기술이
오늘날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유럽에서 손꼽히는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주목하는 것이 바로 이 문제,
즉 과학기술과 산업의 발달이 초래하는
일상적 위험인데요,
오늘은 이 '위험사회'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울리히 벡은 우리가 흔히
'산업화'라고 이해하고 있는 '근대화'를
1차 근대와 2차 근대, 두 가지로 분류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특성을 분석했습니다.
먼저 1차 근대는
농업사회가 산업사회로 바뀌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 시기에는 자연과학적 연구 성과에 기반을 둔
기술적 진보가 이뤄집니다.
때문에 기술적 진보를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신통하다고 취급되는 근대적 물품들이
마구 쏟아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2차 근대 시대가 오는데요,
벡이 말하는 2차 근대는
1차 근대화로 인한 변화가 충분히 일어난
이후의 시기를 말합니다. 산업사회가 성숙했을 때 나타나는 사회가
바로 2차 근대입니다.
이 시기에는 1차 근대에서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근대적 물품이
알고 보니
우리를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면서
기술적 진보를
마냥 낙관적으로 바라보지 않게 된다고
벡은 생각합니다.
자연을 지배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과학이
오히려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는
위험 요소로 부각되는 전환을
벡은 2차 근대의 특성이라 말합니다.
벡이 말하는 2차 근대는
후진국 병이 아니라
선진국 병이 발생하는 단계인 셈입니다.
한 때 건축 자재로 많이 사용되었던 '석면'
기억하시죠?
지금은 건축 자재로 석면을 썼던 건축물에서
석면을 제거하는 게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지하철 역사에서도 한 때 석면이 쓰였다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공사를 해서
석면을 철거하기도 했습니다.
벡의 분류법에 따르면
석면을 슬레이트로 만들어 건축자재로 쓰던 단계는
1차 근대입니다.
반면 신통방통한 소재로 여겨지던 슬레이트가
1급 발암 물질로 판명되어
석면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불안에 떠는 사회는
2차 근대로 볼 수 있습니다.
벡의 분류법을 따르면
한국은 2차 근대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죠.
벡은 2차 근대의 성격을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위험을 두 가지로 구별합니다.
하나는 재난으로서의 위험, 즉 danger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으로 인식된 위험,
즉 risk입니다.
재난은 인간의 한계를 입증하는 위험상황입니다.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것이 바로 재난이죠.
반면 risk는 사회적으로 인식된 위험,
그래서 인간이 노력하면
피할 수도 있는 위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진은 분명 재난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지형임을
과학적 분석을 통해 알고 있는데도,
그 지역에 대규모의 인구를 수용하는
신도시를 개발하는 경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그 지역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일견 재난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벡의 관점에선
재난처럼 보이는 이 사건은
2차 근대의 위험을 설명하는 사례입니다.
즉 인간이 지진이라는 재난은 막을 수 없었지만,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지역에
신도시를 짓는 위험은
인간이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울리히 벡이 2차 근대의 위험을 밝히고 있는 건
우리를 위험 염려증에 빠트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벡은 『위험사회』를 집필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당연한 시대에 살고 있다.
세계보건기구가
홍역의 완전박멸을 선언하는 그 순간 광우병, 조류 독감과 같은
신종 질병이 등장하고,
우리가 갈증을 없애줄 한 바가지의 맑은 물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전기 문명에 도취되고
화려한 소비문화에 빠져드는 순간,
자칫 인류를 멸종으로 몰아갈 수도 있는
핵발전소들이 도처에 건설된다.
『위험사회』는 이러한 현대 사회를 분석하고
평가하려는 노력이다.
이 위험천만한 풍요의 시대를 안전과 평화의 시대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절박한 과제를 추구한다"
벡은 일상의 위험이 만연한 이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를 고민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위험사회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울리히 벡은 위험의 가능성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위험 가능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전문가들과
관료들의 결탁을 막기만 해도
위험을 예방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위험한 상황이 벌어진 경우
그 배경을 살펴보면
전문가와 관료가 결탁해
위험 가능성을 제대로 논의하지 않거나,
위험 가능성을 숨기고 정보를 독점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벡은 이렇게 위험사회,
즉 근대화와 그 위험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전문가와 관료의 결탁을 막는 등
사회적 안전망을 확보하는 것을
'새로운 민주주의'라고 불렀는데요, 지금 우리사회에도
이 '새로운 민주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