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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인들의 국립묘지 참배
    인문학(humanities) 2021. 12. 15. 23:32

     정치인들이 중대한 정치적 고비에 직면했을 때

    들리는 곳이 있습니다.

    대통령 후보라면 누구나

    출마 선언을 하고 빼놓지 않고 들리는 곳이지요.

    국립묘지입니다.

    우리가 보통 동작동 국립묘지라고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현충원'입니다.

     

    정치인들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기 위해

    그리고 역사적 소명을 다하기 위해

    대권에 도전한다고 선언하고

    측근들과 함께 아주 비장한 표정으로

    국립묘지에 참배합니다.

    물론 전직 대통령 묘지에 들려 참배하기도 하지만,

    정치인들이 반드시 들리는 곳은

    무명용사들을 모신 현충탑입니다.

    현충탑은 국가를 위해 희생된

    이른바 우리가 호국영령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무명용사들의 넋을 기리는 탑입니다.

    대권주자들이 현충탑에 반드시 참배하는 걸 보면,

    우리는 무명용사 탑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인데요,

    우리나라에서만 그러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의 국립묘지 이름은 알링턴인데요,

    알링턴 국립묘지에서도 무명용사의 묘가

    묘지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손꼽힙니다.

    대체 왜 무명용사의 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일까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묻혀 있는 곳인데 말입니다.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베네딕트 앤더슨의 유명한 저서

    <상상의 공동체>라는 책을 한번 보겠습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주의에 관한 연구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사회학자입니다.

    우리는 보통 민족은 한 핏줄을 이어받은

    '혈연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앤더슨은

    이러한 민족의 개념을 확장시키자고 제안한

    학자입니다.

    앤더슨은 민족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족에 담긴 '문화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민족, 즉 nation에는

    혈연 공동체뿐만 아니라

    문화적 공동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거죠.

     

    앤더슨은 혈연 공동체뿐만 아니라

    문화적 공동체라는 의미의 민족,

    즉 nation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국가를

    국민국가, The Nation-State라고 불렀습니다.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다인종 국가를 한번 생각해보죠.

    민족을 혈연 공동체로만 이해한다면

    미국이나 캐나다는 국민국가로 구성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미국이나 캐나다 역시 국민국가입니다.

    혈연 공동체인 동일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미국이나 캐나다는

    국민국가로써 통합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요?

     

    반드시 혈연에 의해 결정되지 않아도

    공통의 상징을 통해 구성되는 국민국가에 주목하면서

    앤더슨은 국민국가를

    '상상의 공동체, Imagined Community'라 불렀습니다.

    상상, 즉 imagined를

    조작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앤더슨이 말하는 상상의 공동체, Imagined Community는

    이미지를 공유한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국민국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인종적 동일성보다는

    국민들이 공유하는 강력한 공통의 이미지가

    결정적입니다.

    우리 모두를 한국인으로 느끼게 만들어주는 어떤 상징,

    인종과 상관없이

    미국인들을 미국인으로 묶어주는

    그 어떤 공통의 이미지가 결정적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기능과 관련해 앤더슨은

    "무명용사의 기념비나 묘지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현충일의 의미를 깨닫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현충일의 노래는

    "겨레와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니"라는 가사로

    시작되는데요,

    어린아이가 겨레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뜻을

    이해했을 리 없죠.

    그에 못지않게 '호국영령'이라는 단어도

    이해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호국영령'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임은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왜 내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죽은 사람을 위해

    묵념을 해야 하는지 잘 몰랐었지요.

     

    그 뜻을 알게 된 것은 한참 지난 후에 일입니다.

    그러니까 전 어린 시절 앤더슨이 이야기한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민족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제가 성장해 '겨레와 나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가사를

    이해하게 된 것은

    제 머릿속에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민족 개념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호국영령'은 제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

    현재의 국가를 가능하게 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국민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지요.

    우리 공통의 현재를 만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공동의 역사를 지닌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무명용사의 탑에 묵념을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지금 영향을 주고 있는

    역사를 떠올리고

    그 역사를 존중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호국 보훈의 달에

    국민국가, 공동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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